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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와 "아직 아닌" 부활(고전15장의 부활에 관하여)
"아직 아닌 것"이 "이미"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바울의 묵시적 부활이해를 판넨베르크의 실재론으로 설명)!
성경은 부활을 죽음에 굴복당한 모든 인류와 자연 만물의 존재와 질서의 새창조에 관한 것으로 묘사한다. 바울은 고전15장 12절 이하에 종말에 있을 우주적 부활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종말의 부활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종말에 있을 부활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마지막에 있을 부활에 우리가 참여할 것에 대한 보증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마지막에 있을 부활에 우리가 참여할 소망이 사라지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서 자는 자들도 망한 것이라고 말씀한다(18절).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는 가짜이고, 그리스도의 죄사함도 거짓이고,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종말의 다시 사는 소망이 사라지게 된다. 현재만이 그들의 소망이 될 것이다.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모든 사람가운데 더욱 불쌍한 사람들이 될 것이다(19절).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으므로, 죄사함도 참이고(17절),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에 있을 우주적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20절). 우리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생명의 부활에 참여할 확실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종말에 있을 부활의 선취이고, 선재이다. 종말이 이미 선취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이미" 시작된 종말(부활)과 "아직 아닌" 종말(부활) 사이에 산다. 오스카쿨만은 그리스도인들이 D-day(이미)와 V-Day 의 긴장안에 산다고 설명한 적이 있다. D-day가 있기 때문에 V-Day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쿨만의 D-day와 V-Day의 긴장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긴장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 삶의 존재하는 긴장은 전적으로 하나님때문에, 종말의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긴장이다.
판넨베르크는 그의 저서 Offenbarung als geschichte(역사로서의 계시) 와 Faith and Reality 에서 미래(종말, Not yet)가 현재(이미 사건, already)보다 존재론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미래가 현재보다 우선한다는 말은 아직 아닌 우주적 부활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바울의 부활에 대한 묵시적(종말론적)이해와 잘 연결된다. 역사는 미래를 향해 열려있지만, 그러나 현재적 사건들에 의해 인과적으로(D-day 에서 V-day 로 흐르는 것처럼) 결정되는 것(이는 이미 양자론에서 거절됨)이 아니다. 역사는 종말에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열려있다. 종말에 자신을 온전히 계시하시는 하나님께서 역사에 초월적으로 간섭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종말이 존재론적으로 현재보다 우선하는 것이다.
역사의 긴장, 그리스도인의 긴장은 과거와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흐르는 삶의 인과적 동인들때문이 아니라, 그 역사에 미래이신 하나님께서 초월적으로 간섭하시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긴장"은 법에 메여 있는 자연의 역사를 하나님의 목적하신 곳으로 끌고가시는 힘때문에 발생한다. 종말이 존재론적으로 현재보다 우선하기 때문에 역사에 긴장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우리 죄의 본성과 싸우게 하시기 때문에 우리 삶에 긴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우리에게 목적하시는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삶에 긴장이 있는 것이다. 판넨베르크가 말한 것처럼 역사란 하나님의 약속때문에 존재한다. 모든 불합리와 악과 죽음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역사는 종말의 하나님이 끌고 가신다. 우주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향하고 있다.
이와같이, 바울은 반드시 종말에 있을 하나님이 목적하신 전 우주적 부활때문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론을 알 수 없는 긴장안에 사는 것이 아니라, 결과가 현재를 결정하는 힘, 종말을 가져오시는 성령의 힘이 현재(지금)의 힘을 역전시키는 긴장안에서 사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긴장이란 우주의 역사를 몰아가는 성령의 바람이 만들어내는 거부할 수 없는 힘때문이다. "아직 아닌"것이 "이미"와 "지금 여기"를 결정한다. "부활신앙"이란 바로 여기에 "이미" 선재하는 종말(아직 아닌 것)을 사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도덕이라도, 철학이라도 "부활"을 거부해서는 안된다. 종말에 있을 부활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철학의 참된 모판이다. 생각해보면, 부활신앙에는 오히려 부활의 역사성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이들이라도 두손 들고 반가워 할 그 실존적 결단이라는 도덕이 자리잡고 있다. 이미 선재하는 종말, 하나님 통치(Kingdom of God)의 임박한 현실성이 성도들에게 과격하게 도전하는 삶, 그리고 그 삶의 긴장들! 거기에, 현재적 악과 불의한 질서에 대한 저항의 몸부림이 없을 수 있겠는가?
또한, 부활신앙은 하나님앞에서 영원토록 전 우주적 생명의 연대안에 사는 삶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에 참된 생태학이다. 현실에 대한 이런 과격한 도전이 어디에 있는가? 이런 도덕과 참된 철학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성을 부정하거나, 부활신앙을 기독교 근본주의에 뿌리박은 맹신으로 비난하는 것은 기독교의 부활신앙의 묵시적, 종말론적 성격에 대한 진지한 반성이 없는 것이다.
부활을 부정하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에 흔하고 흔한 도덕과 철학을 얻게 될 것이다. 부활을 믿으라! 그러면, 세상의 종말로부터 불어오는 성령의 바람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림 1. 헤겔의 무덤(베를린 시립묘지, 저자가 박사논문 표지로 이용) 그림2.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그림 3. 출처: 기독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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